광복 74돌 맞아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
광복 74돌 맞아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
  • 지병호 기자
  • 승인 2019.08.15 2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영월군 고씨동굴 공원 일원에서 진행
- 항일운동 발상지, 의병장 배출 역사적 영월
- 의병들 넋을 기린다.

<연리지 TV - 편집장 지병호>영월문화원(원장 엄흥용)은 광복 74돌을 맞아 14(수) 오전10시, 고씨동굴 공원 일원에서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을 마련했다. 폭 2.5m, 높이 5m 규모로 건립된 창의비에는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이곳 진별리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고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한 고종경 의병장 형제의 충절이 담겨져 있다. 이를 통해 항일운동의 발상지이자 의병장을 많이 배출한 역사적인 영월 홍보와 일제에 맞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의병들의 넋을 기리고자 한다. 

또한, 항일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향후 의병공원 조성 등 꾸준히 의병 현창사업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임진의병장 고종경(髙宗慶)은 1540년(중종 35)을 전후하여 부친 고광후(髙廣後)와 영월 엄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젊어서부터 인품이 순후(淳厚)하고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예(武藝)도 출중하였다. 그는 제주 고씨 고을나(髙乙那)의 후손으로 파조 고인비(髙仁庇)는 고려시대 병부시랑(兵部侍郎)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충렬왕 때 화전군(花田君)에 봉해져 횡성지역의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성장하였다. 고조부 고습(髙襲)은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 행금성현령(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金城縣令)으로 추증되었고, 증조부 고사신(髙思信)은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계공랑 행전옥서주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啓功郞行典獄署主簿)로 추증되었다. 조부는 고항산(髙恒山)으로 참봉이었고, 그의 종조부(從祖父)인 익장공(翼莊公) 고형산(髙荊山)은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호조·병조 외 6조판서와 우찬성 등 요직을 차례로 역임한 인물이었다.
  영월 화전군파 입성조인 그의 부친 고광후(髙廣後)는 서종형제(庶從兄弟)가 역모에 연루되자 가족과 함께 횡성을 떠나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로 이주하였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고종원(髙宗遠)·고종경(髙宗慶) 형제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짓고 통문(通文)을 돌려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하여 ‘영월임진의병(寧越壬辰義兵)’을 창의하였다. 의병들은 학식과 지혜를 겸비하고 문무(文武)가 출중한 고종경을 ‘의병 창의대장(義兵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강원도 관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고종경을 불러, 관군 500명을 원주 흥원진(興原陣)으로 인솔하게 하였다. 전쟁을 두려워한 군졸들이 어두운 밤을 틈타 도망하자, 이를 추포하느라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 강원도 관찰사는 지휘책임을 물어 고종경을 영월관아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1592년 8월 17일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영월로 쳐들어와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종원은 가족들과 강 건너 노리곡 동굴(고씨굴)에서 피난 중 왜적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부인은 참봉 조빈(曺彬)의 딸로 왜적들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고씨굴에서 자결하였다. 8월 19일 고종원·고종길 형제는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함께 영월 봉서루(鳳棲樓)에 갇혔다. 이후 주천 빙허루(憑虛樓)를 거쳐 원주관아로 끌려가서 감금되었다. 포로가 된 평창군수와 종원·종길 형제는 1592년 9월 2일 천둥과 폭우가 쏟아지는 날 원주관아를 탈출했으나, 동생 종길(宗吉)은 원주 단구역(丹邱驛)에서 왜적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영월 임진의병의 역사는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이곳 진별리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간 고종경 의병장 형제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빗돌을 세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